책을 읽고 나면 기억에 남지 않는 걸까
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 남는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, 의외로 읽었던 내용들이 금세 희미해진다. 분명히 책을 읽는 동안에는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고, 어떤 문장은 마음에 깊이 와 닿기도 한다.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남는 건 그 책의 제목과 대략적인 주제뿐이다. 왜 그럴까? 나는 책을 잘못 읽고 있는 걸까, 아니면 원래 독서란 그런 걸까?
가끔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아쉬운 기분이 든다. 이토록 시간과 마음을 쏟았는데 왜 정작 중요한 부분들은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을까? 특히 좋은 문장을 만나면 그 순간은 감탄하며 밑줄을 긋고,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곤 한다. 하지만 정작 그 문장을 나중에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. 이런 경험이 반복될 때면 독서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한다.
그러나 한편으로는 책의 모든 내용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.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,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. 어쩌면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'기억'보다는 '영향'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. 책은 읽는 동안 나의 생각을 자극하고,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태도나 관점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 것 같다.
예를 들어, 어떤 책에서 배운 교훈이나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당장은 떠오르지 않더라도, 나도 모르게 내 행동에 반영될 때가 있다.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? 반드시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 않아도, 책을 통해 나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본다.
또한, 책을 읽는 경험 자체가 나의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느낀다. 마치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모든 음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, 그 음악이 나에게 준 기분은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. 독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. 기억은 희미해질 수 있지만,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은 나의 일부분이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.
이제는 책을 읽고 나서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 내려놓으려고 한다. 대신 책을 읽는 순간순간을 충분히 즐기고, 그 책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를 느끼는 데 집중하고 싶다. 읽고 나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.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, 그리고 그 흔적이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.
책은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, 그 순간의 나를 만들어 준다.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읽을 것이다. 언젠가 그 흔적들이 내 삶의 중요한 지점에서 빛을 발할 거라 믿으면서.